비평권력에 대한 단상

각종 미디어 2007/08/11 20:43
91년 7,8월 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바둑계의 한 중견 프로기사가 월간바둑에 '비평가 무용론'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칼럼을 게재했다. 16년 전의 이야기이니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프로기사는 당시 월간바둑은 물론 각 일간지의 바둑전문기자들을 싸그리 비판하면서 바둑비평, 바둑해설, 바둑평론은 필요없다는 식의 주장을 펼쳤다.

그 당시에도 바둑을 두뇌스포츠로 육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던 시점이어서 팬과 프로기사를 이어주는 바둑해설가, 바둑기자들의 무용론을 주장하는 그 칼럼은 너무나도 당황스러웠고 도발적이었다. 나는 프로기사와 팬들을 이어주고 바둑계의 저변을 확대하는 주역들인 바둑해설가들에 대해 프로기사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인식을 가질 수 있을까 분개했다.

월간바둑 정기구독자였던 나는 너무나 흥분해서 월간바둑 편집팀에 전화까지 했다. 나중에 정용진 편집장(지금도 계신지 모르겠다)이 전화를 이어받아 30분넘게 통화를 했던 기억이 난다.

종류를 막론하고, 어떤 '매체'에 항의전화를 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프로기사는 왜 그런 칼럼을 게재해야만 했을까. 또 그 때 나는 왜 그렇게 흥분했을까.

온라인으로 바둑을 두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던 그 시절에 월간 바둑은 바둑애호가들에게 새롭고 '권위있는' 정보를 전달하는 거의 유일한 창구였다. 매체가 없다보니 일간신문에서 문화면 한 귀퉁이에 십몇수씩 중계해주는 프로기전 코너도 열심히 읽을 수 밖에 없었고 그 다음수를 알기 위해서는 다음날 신문을 사봐야 하던 시절이었다.

결국 아마추어 바둑팬들은 전국을 통틀어 10여명 밖에 되지 않는 바둑기자들이 전달해 주는 몇 줄 안되는 기사들이 프로바둑세계에 대해 알 수 있는 유일한 정보였고, 그것만이 정보에 대한 갈증을 충족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당시에는 나같은 아마추어에게 바둑정보를 전달해 주는 그런 고맙고 훌륭한 바둑기자들을 까대는 그 프로기사가 정말 이해하기 힘들었다. 심지어 '그 프로기사는 프로자격을 박탈해야 한다'고까지 전화에 대고 흥분했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참으로 우매한 중생이었다.

비단 바둑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는 '기자', '평론가', '작가'라는 직업은 콘텐츠 생산자와 콘텐츠 소비자를 이어주는 고리로서 그 사회적 역할이 명확하게 주어져 있는 훌륭한 직업이었고 사명감과 권위,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직업이었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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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한국기원이 운영하는 인터넷 바둑방 '오로'에는 프로기사나 아마추어나 심지어 서로 언어가 다른 사람들끼리 옹기종기 한 자리에 모여 바둑을 둔다. 누구나 보고 싶을 때 그 방에 들어가서 프로기사의 바둑을 구경하고, 내가 두는 동네바둑도 예쁜 얼굴의 아가씨 프로기사가 예쁜 목소리로 초읽기를 해준다.

단과 급이라는 계급장은 여전히 남아 있을 수 밖에 없는 실력승부의 세계이지만 거기에는 이미 '권위'는 낄 자리가 없고, 콘텐츠 중개자의 자리도 없다. 프로기사의 바둑을 구경하면서 14급짜리 아마추어가 참고도를 만들어서 올려도 누가 뭐라 하지 않는다.

콘텐츠 중개자의 자리는 없다. 신문쪼가리를 사 봐야 한 줄이라도 읽을 수 있는 그런 시대는 갔다. 이제 다시는 오지 않는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가 된 글들]
진중권_달갑지 않은 자의 달변
전문가의 존재이유
비평의 종말 - 디워 관련 100분토론 단상 1.
권위적 계몽주의의 종언 - 디워 관련 100분토론 단상2.

Trackbacks 4 : Comments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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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racked from 민노씨.네 2007/08/11 21:19 DELETE

    Subject: 디워 현상 ; 권위적 비평권력의 붕괴와 대중 나르시시즘의 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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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Tracked from 민노씨.네 2007/08/11 21:19 DELETE

    Subject: 비평의 마음과 비평의 몸 - 계몽주의 블루스

    #. 정말 디워 얘기는 그만하고 싶었는데요. 주말이고, 뭐 블로깅하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지도 않고, 가볍운 마음으로 끄적거려봅니다. 이 글은 특히 제 글에 명랑님께서 보내주신 글약간 짜증이 나는 허튼소리http://philsnote.egloos.com/3330133에 보내는 트랙백입니다. 비평의 마음과 비평의 몸 - 계몽주의 블루스: 대중은 지식을 거절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지식을 무기로 군림하려는 태도를 거절할 뿐입니다. 우선 황우석 사태의 광..
  3. Tracked from '명랑노트' 시즌 2. 두 번째 여름 2007/08/11 23:34 DELETE

    Subject: 약간 짜증이 나는 허튼소리

    이건 무슨 계몽사상의 완전판도 아니고...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파시즘을 찾고, 집단광기를 끌어들여서 대중을 매도하느냐?" 올블로그 올라온 글들을 대충 제목만 훑어보다가 그런 문구를 봤다. 말은 쉽다. 그래서 지금은 어떤 시대이길래 집단광기와 파시즘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것이 천부당만부당해진 것일까? 그래, 황우석 사태가 지나간지 10년이 지났나, 20년이 지났나? 집단광기를 직접 목격한 세대가 이따위 허튼소리나 주절거리는 걸 보...
  4. Tracked from '명랑노트' 시즌 2. 두 번째 여름 2007/08/11 23:34 DELE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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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의 재구축: 그들의 절대명제- 모르는 말을 하는 자, 죽일지어다. 2007년 진중권은 어떤 영화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해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말을 썼다. 그리고 그 말을 쓰기 위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했다. 이에 대해서 대중은 맹목적인 배척을 보여주었다. 자신들이 모르는 말을 쓴다는 이유에서다. 2005년 어느 블로거는 어느 수의학자가 만들어내는 현상에 대해서 파시즘이라는 말을 썼다. 그리고 그 말을 쓰기 위해서 정치학 ...
  1. Favicon of http://www.i-rince.com rince 2007/08/11 23:54 Modify/Delete Reply

    필로미디어님의 새로운 면(오래전 모습이지만^^)을 볼 수 있군요. 우매한 중생이라고 표현을 하셨지만, 당시 바둑에 대한 열정도 느껴지는데요? ^^; 즐거운 주말되세요!~

    • Philomedia 2007/08/12 01:01 Modify/Delete

      네 린스님도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2. Favicon of http://anarcho.tistory.com 속류히피 2007/08/12 10:29 Modify/Delete Reply

    "단과 급이라는 계급장은 여전히 남아 있을 수 밖에 없는 실력승부의 세계이지만 거기에는 이미 '권위'는 낄 자리가 없고, 콘텐츠 중개자의 자리도 없다. 프로기사의 바둑을 구경하면서 14급짜리 아마추어가 참고도를 만들어서 올려도 누가 뭐라 하지 않는다."
    아무도 이런 거 부정하는 사람없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바라는 사람이 많죠. 제 글에서도 분명하게 언급했지만 14급짜리의 참고도에 오류가 있으면 그걸 바로잡는 것은 전문가의 몫일 뿐이라는 겁니다. 전문가가 아니라도 누구든지 그 오류를 지적할 수 있겠지만 전문가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권위를 언제든지 깰 수 있다는 것과 권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제가 "모든 권위를 부정하라!"는 아나키스트들의 주장에 일부 동의하는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죠.
    전문가의 권위를 인정한다고 해서 님이 쓰신 글에서 나타내는 시대의 조류를 부정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좀 다른 얘기지만, 전 님의 글이 나타내는 세상을 우리에게 가져다준 여러 요소 중에 진중권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블로거들이 지적하는 진중권의 권위적이고 계몽주의적인 전문가의 모습이 제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죠. 그렇다면 그건 전적으로 저의 선입관에서 비롯된 것일 테니 좀 돌아봐야겠습니다. 제 자신을요.
    하여간, 누가 제 글을 인용한 것은 처음이라 반갑습니다.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

    • Favicon of http://philomedia.tistory.com PhiloMedia 2007/08/12 14:32 Modify/Delete

      직접 방문하여 의견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역시 '전문가의 존재이유'에 관한 히피님의 생각에 동의하는 편이구요, 이 글은 제 의견보다 현 시대조류를 표현하는 데 좀 더 중점을 두었습니다.

      저도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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