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주의 단상

일상 잡담 2009.04.15 18:01
근본주의[, fundamentalism] 가 근본에 충실하자는 뜻 정도로만 사용된다면, 근본주의자들이 근본에 충실한 삶을 지향하는 것 뿐이라면, 근본주의에 부정적인 색깔이 칠해질 리 없다.

근본주의가 근본에 충실하는 것을 넘어서 '주의'가 되고, 그것이 부정적인 이미지를 형성하게 된 것은 자신이 근본이라고 믿는 신념 외의 다른 신념을 배척하고, 이단으로 규정하고, 자신의 신념에 타인을 동화 내지는 정복하고자 하는 행동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근본주의라는 말의 시초가 된 기독교 근본주의는 특히 그 근본주의의 해악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나는 그 이유가 '땅 끝까지 전하라'는 기독교 최후의 '미션(Mission)'과 연관돼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미션은 특히 예수께서 부활후 승천하기 전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이라는 '상황'과 맞물리면서 기독교인들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사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이것이 근본주의와 만나면 유한한 존재인 인간들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을 초래하기도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셨다고 전해지는 말씀들 가운데 내가 가장 믿기 어려운 말이 바로 "땅 끝까지 전하라"는 말인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정말 예수께서 저렇게 말씀하셨을까? 과연 무슨 뜻으로, 그리고 유한한 존재들인 인간들이 저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 예수께서는 과연 다 알면서도 하신 말씀일까?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보자.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사도행전 1장 6~9절, 개역한글성경)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장 18~20절, 개역한글성경)

개신교에서 "땅 끝까지 전하라" 라고 요약하는 말씀의 출처가 되는 두 곳의 성경본문인데, 두 구절의 뉘앙스는 사뭇 다르다.

사도행전은 사도 바울(Paul)과 함께 선교여행을 다녔던 의사 누가(Luke)의 기록이고, 마태복음은 예수의 열두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마태(
Matthew)를 따르던 누군가가 대신 기록했다고 하는 책이다.

누가(Luke)는 예수를 땅 위에서 만난 적이 없는 사람(비유태인)이고, 신원미상의 마태복음 저자(유태인일 가능성이 농후)는 예수를 만난 적이 있는지 확실치 않지만 예수를 직접 따르던 마태로부터 전해 들었을 가능성은 높으니 좀 더 실제 내용에 가깝다고 쳐주자.

하지만 직접 만나서 들었느냐의 여부가 기록의 정확성을 가름하는 유일한 잣대는 아니다. 모든 기록에는 목적이 결부된다.

오히려 두 구절의 뉘앙스 차이는 저자의 출신배경과 종교적 입장 차이에서 더 크게 드러난다. 부활한 예수에게 "이제 로마에서 독립해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때가 도래한 거냐"고 제자들이 질문하는 구절을 먼저 적고, "니들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고 동문서답하는 장면으로 만든 누가의 기록이 더 진실에 가까운 것인지, 그런 구절은 쏙 빼놓고 마치 "세계로 나가라, 너희 뒤에는 내가 있다" 고 말씀하신 것처럼 표현한 마태복음이 더 진실에 가까운 지는 예수님만이 알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왜 쓰고 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블로그를 돌아다니다가 벌써 오래 전 얘기인 블로그 근본주의 이야기를 다시 보게 돼, 근본주의라는 말에 대해 생각하다가, 그만 이런 이야기까지 와버렸다.

하여간 이 글의 요지는 기독교 근본주의에 대한 고찰... 이런 거 아니다.
세상의 모든 근본주의에 대한 이야기다.

근본에 충실하자. 하지만 타인의 근본을 내 근본과 비교해 근본을 강요하지 말자.. 뭐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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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backs 2 : Comments 11
  1. Favicon of https://infobox.tistory.com 리카르도 2009.04.15 21:26 신고 Modify/Delete Reply

    블로깅이 그런 재미가 있죠. 쓰다보면 생각이 계속 이어지는..
    분위기에 맞춰 놀다보면 자연스레 놀아지는(?) 것처럼
    글쓰기도 그것과 비슷한 면이 많은것 같습니다. :)

  2. Favicon of https://j4blog.tistory.com 재준씨 2009.04.15 21:38 신고 Modify/Delete Reply

    구약에선 지옥이 언급된 적이 없다더군요. 중세엔 성경을 읽는 것만으로 이단으로 처형당했다더군요.
    그냥 요즘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무지한 저돌성 전도를 생각해봤습니다.

  3. Favicon of https://normalog.com 무한™ 2009.04.21 02:44 신고 Modify/Delete Reply

    이 글을 읽고 나서, 필로스님이 스무디를 안 좋아하실 것 같다고 생각한 1인

    • Favicon of https://seires.tistory.com 이승환 2009.04.22 10:56 신고 Modify/Delete

      필로스님이 바로 그 40대 남성이시죠...

    • 필로스 2009.04.22 20:55 Modify/Delete

      오랜만에 제 블로그에 들어왔더니, 이런 선문답이 펼쳐지고 있었군요... 무슨 말씀들인지 도통....

    • Favicon of https://normalog.com 무한™ 2009.04.22 22:23 신고 Modify/Delete

      어익후 죄송합니다.

      http://www.realfactory.net/968

      참고글 입니다 ^^

    • 필로스 2009.04.23 15:10 Modify/Delete

      댓글단 다음에 집히는 게 있어서 승환님 블로그에 가서 봤습니다.. 이런 뒷담화가 포스팅되다니 ㅋㅋ

    • Favicon of https://greendayslog.com 그린 데이 2009.04.29 21:51 신고 Modify/Delete

      ㅋㅋㅋ 오랫만에 들렀다가 페이지를 넘기며 계속 웃고 있습니다. (역시 필로스님!) ...;
      그나저나 지금 비타민에서 '발기부전'을 주제로 방송중인데, 언론사 사이트에 지저분하게 걸려있는 '그 약'은 아무 효과가 없으니 절대 사먹지 말라네요. 방송 후로 광고들이 좀 사라졌으면 하는 1인...;

    • Favicon of https://philomedia.tistory.com PhiloMedia 2009.05.07 00:11 신고 Modify/Delete

      그린데이님 근데 그 얘기를 왜 저한테 하시는지...(쿨럭)

    • Favicon of https://normalog.com 무한™ 2009.05.07 04:17 신고 Modify/Delete

      그린데이님//
      이로써 필로스님의 비밀이 하나 밝혀지는 겁니까?
      필로스님 효과 없다네요~
      드시지 마세요~
      (한 삽 추가하는 센스 ㄳ)

  4. Favicon of http://www.uxmason.com 정영진 2010.07.12 02:30 Modify/Delete Reply

    생각을 표현할 때 굳이 논리적일 필요는 없지요. 그대신 좋은 화두라서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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