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영문법 강의

일상 잡담 2009.07.07 23:06
나는 유신말기에 중학교를 다녔다.

그 당시에 중학생이었던 사람들 대부분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 또래에게 '유신'이라는 단어는 '새마을운동'이나 '국민교육헌장', '국기에 대한 맹세' 등과 마찬가지로 일상이었고 상식이었다. 거기에 대해 그 어떤 반감이나 나쁜 이미지, 또는 불온한 이미지는 결부될 수 없었다.

유신이라는 단어에 대해 처음으로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된 것은 희한하게도 내 학창시절의 유일한 과외학습이었던 영어학원에서였다.(전두환이 정권을 잡으면서 과외금지조치가 내려졌기 때문에 중학교 이후에는 학원을 다닐 수가 없었다)

당시 대구 시내에는 큰 학원이 두 개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유신'학원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내가 수강한 기초영문법(속칭 '빨간기본영어' 강의) 선생님은, 학원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강의 중에 수시로 반정부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분이셨다.

그렇다고 해서 영문법 강의를 하다가 정부를 비판하는 발언을 직접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고, 강의 내용에 정치적인 수사를 녹여냄으로써 강의내용이 머리에 쏙쏙 들어오도록 만드는 아주 독특한 선생님이었다.

예를 들어, 지금도 잊지 않고 있는 강의내용 중에 이런 게 있다.

so + 形(형용사) + a(부정관사) + 名(명사)
such + a+ 形 + 名

우리는 이걸 그냥 소형어명서치어형명 식으로 무작정 외우고만 있었는데, 그 선생님은 이것을 '소 형상이 곧 어명이다. 그런 걸 어떻게 혁명이라고 하나?' 는 식으로 바꿔서 가르친 것이다. 아시겠지만 소는 당시 집권당인 민주공화당의 상징이었다.

정말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강의였다. 한 번 들으면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런 식의 생각은 추호도 해 보지 못했던 어린 학생들에게는 일종의 충격요법이 가미된 강의라고 할 수 있었다. 친구들 중에는 신고해야 한다는 녀석도 있었다. 하지만 그 선생님의 강의는 수강생이 갈수록 늘어나는 인기절정의 강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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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갑자기 이 이야기가 떠오른 것은 퇴근길에 차 안에서 '전교조 시국선언'을 놓고 왈가왈부하는 KBS라디오의 백분토론을 들었기 때문이다. 운전중만 아니었으면 KBS에 전화라도 걸 뻔했다.

내 주장은 이렇다.

우리가 성숙한 시민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회구성원들의 건전한 정치의식이 필수적이다. 아직 미성숙한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정치에 참여하거나 아이들에게 정치의식을 가르치는 것은 잘못된 것(아이들에게 해로운 것)이라는 주장들을 많이 하시는 것 같은데, 건전한 정치의식을 함양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어릴 때부터 다양한 정치적 견해에 노출되는 것이 더 낫다고 본다.

그것은 조기 성교육이 필요한 것과 똑같은 이유에서다.

전교조 선생님의 주장이든 뉴라이트 선생님의 주장이든 정치적 견해는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일찍부터 경험하고, 또 어떤 주장이든 맹목적인 암기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스스로의 정치적 견해를 피력할 수 있는 능력을 만들어주는 것도 민주주의 사회의 중요한 교육과제가 아닐까?

어떤 주의 주장을 주입식으로 교육하기보다는 어떤 주장이든 자신의 신념은 말할 권리가 있고 나와 다른 신념도 들을 줄 알아야 한다는 교육 말고 민주주의 교육에 더 중요한 게 어디 있을까.

나는 전교조의 정치적 견해에 동의하기도 하고 때로는 동의하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말할 수 없는 사회, 그것이 곧 독재국가가 아니고 뭔가.

사족)
어린 청소년들을 정치적 견해에서 떼어놓으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어린 아이들은 인터넷에만 넘쳐나는 편향된 사고에 물들 가능성이 더 크다. 어린 아이들이 주입식 교육을 받아 교과서만 달달 외우는 것도 싫지만 스스로의 가치판단없이 분위기에 휩쓸려 촛불을 드는 것 또한 보기싫기는 마찬가지다.

써놓고 보니 위에 쓴 이야기와 아래에 쓴 이야기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나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런 추억이 떠올랐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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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backs 0 : Comments 12
  1. Favicon of http://www.raytopia.net 레이 2009.07.08 07:08 Modify/Delete Reply

    아이들을 온전한 인격체로 보지 않는다는게 가장 큰 문제 아닐까요 ^^

    • 필로스 2009.07.16 20:08 Modify/Delete

      가만히 보면 아이들 교육문제와는 상관없는 논쟁인 것 같아요.

  2. Favicon of https://j4blog.tistory.com 재준씨 2009.07.10 13:41 신고 Modify/Delete Reply

    유신학원...생긴 것이 뻘쭘하니 콘크리트 블록 하나 갖다놓은 볼품없는 모양새였죠. 옆에있는 대구학원에 비해 뭔가 정감이 없는...
    그러고보니 영남대 도서관도 그런 형상 비슷한 것 같습니다. 둘 다 살짝 연관이 있긴 하지만 :)

    말씀처럼 어릴 때부터 다양성을 경험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가치관을 형성해가는 것이 필요한데 우리는 너무 자식들을 온실속에서 키우려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결국 제멋대로인 초글링 양성 중. -_-a

    • 필로스 2009.07.16 20:09 Modify/Delete

      옆에 있던 학원 이름이 생각안났었는데, 대구학원이었군요 ㅋ

  3. Favicon of http://mindlog.kr 비트손 2009.07.10 17:46 Modify/Delete Reply

    저도 유신학원 다녔었는데...그러고 보니 학원 후배......;;
    나도 다른 것을 설득하는 방법보다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좀 배웠더라면 저도 좀 더 나은 인간이 되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더라구요. :)

    • 필로스 2009.07.16 20:13 Modify/Delete

      비트손님이 학원후배였군요... 반갑습니다 ㅎ

  4. Favicon of http://sepial.net sepial 2009.07.20 07:17 Modify/Delete Reply

    저는...서...서...서면 학원...
    부산에 있었다는....^^;
    가서 잔 기억 밖에 안나네요....
    그나저나 메타 블로그로 나들이 너무 오랫만이네요....^^

    • 필로스 2009.07.20 15:17 Modify/Delete

      오오오... 이게 누구세여... 심샛별님 아니신가여..반갑습니다...

      블로그 접는다는 포스트보고 rss에서도 지웠었는데, 다시 열심히 하고 계시네요...

  5. 정마온니 2009.07.21 21:25 Modify/Delete Reply

    미리내님 댁에서 빛진거 값아 드렸습니다. ^^

    • 필로스 2009.07.21 21:56 Modify/Delete

      하핫 감사합니다

  6. Favicon of http://mjoplin.textcube.com 백조트래핑 2009.07.22 09:11 Modify/Delete Reply

    정말 명강의네요 !! 잊을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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