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애플

일상 잡담 2010.04.05 17:09
아버지는 평생을 인쇄소에서 일하셨다. 일제 강점기에 할아버지를 잃고, 전쟁이 끝난 뒤 할머니를 여읜 아버지는 고등학교를 채 마치지 못하고 인쇄공이 돼 한 직장에서 평생을 일하셨다. 아버지는 늘 당신을 '세재이'라고 불렀는데, 마치 스스로를 욕하는 것 같아서 무슨 말인지 물어볼 수 없었다. 나중에서야 그게 인쇄쟁이를 줄여서 부른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어릴 적 인쇄소의 모습과 가장 흡사한 사진 (출처)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납활자들과 잉크냄새. 아버지께서 주로 계시던 암실의 매캐한 약품냄새. 아버지 친구의 손가락을 네 개나 해먹었다는 거대한 절단기를 보고 무서웠던 기억. 아들 읽으라고 한 꾸러미씩 들고 오시던 파본된 책들.

활자공에서 사진제판공으로, 나중에는 한 눈에 잉크농도를 척척 조절하는 컬러옵셋인쇄 전문가로 인정받고 사셨던 아버지는 말년(90년대중반)에 "그놈의 매킨토시 때문에 우리는 할 일이 없어져서" 은퇴하셨다. 아버지께서 매킨토시 때문에 은퇴하신 그 무렵에 나는 신문사에서 애플 담당기자로 일했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 * *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한다. 변화의 속도가 갈수록 심해져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다. 처음 입사했을 때만 해도 회사에 컴퓨터라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원고지에 세로로 기사를 써서 데스크에 제출했던 시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회사에 PC가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니터가 컬러로 바뀌었다. PC통신문화에 좀 적응하나 했더니 인터넷이라는 게 나오고, 휴대폰이 생기고, 자고나면 새로운 기기가 나타나 습관을 바꾸고 속도를 바꾸었다. 신문을 인터넷으로 만드는 일이 생기고 블로그라는 게 유행하더니 소셜미디어가 세상을 뒤덮고 아이폰과 트위터가 또다른 세상을 보여준다. 도대체 세상은 얼마나 더 빨라져야 가속페달을 멈출 것인가?

                                                                   * * *

2030년 모월 모일. 필로미디어 2세의 일기장.

아버지는 늘 컴퓨터를 끼고 살았다. 지금은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커다란 컴퓨터가 아버지의 재산목록 1호였다. 출근할 때는 그 무거운 컴퓨터를 가방에 싸서 나가셨고 퇴근후에나 주말에도 컴퓨터를 꺼내놓고 무언가를 계속 들여다보고 계셨다.

아버지께서 사용하시던 컴퓨터는 지금은 사라진 삼성센스노트북이라는 것이었는데 모니터에 큼지막한 키보드가 붙어있고 마우스라고 부르는 쥐새끼처럼 생긴 조작도구를 연결해서 사용하는 매우 불편한 기계였다. 지금은 어디에서나 설치돼 있는 유리판에 손가락만 갖다대면 내 개인화면이 나타나 언제든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지만 그 때만해도 자신의 컴퓨터는 늘 가지고 다녀야 했고 고장도 자주 나서 걸핏하면 프로그램을 설치하느라 골머리를 썩혀야 했다.

아버지는 스스로를 폰맹이라고 한탄하듯이 말했다. 아버지께서 한창 잘 나가실 때는 인터넷이 막 등장해 꽃을 피우던 시기였다. 인터넷이 세상을 바꿀 거라며 주야를 가리지 않고 인터넷에서 일을 하시던 아버지는 그러나 모바일 시대에는 적응하지 못하셨다. 애플이 아이폰을 발명해 세상에 선보인지 한참을 지났지만 덩치큰 컴퓨터만 끼고 사셨다. 하지만 그 작은 화면에 깨알같은 글씨를 어떻게 보느냐던 아버지도 애플이 아이패드라는 큰화면 제품을 내놓자 항복선언을 하고 손에서 일을 내려놓으셨다.

구글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애플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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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backs 0 : Comments 6
  1. Favicon of http://ilove1t.com 맑은하늘 2010.04.05 17:35 Modify/Delete Reply

    아 멘. . .

  2. Favicon of https://www.elliud.net 의리형 2010.04.05 22:05 신고 Modify/Delete Reply

    발전은 제곱의 속도로 달려가고..

  3. Favicon of https://krlai.com 시앙라이 2010.04.05 22:21 신고 Modify/Delete Reply

    아 애플과의 악연이라고 해야하나요?
    찡합니다...

    아이패드 사용하시는 모습을 기대할께요

    • 필로스 2010.04.06 19:29 Modify/Delete

      악연을 좋은 인연으로 만들어봐야지 ㅎ

  4. Favicon of https://zoominsky.com 짠이아빠 2010.04.06 06:01 신고 Modify/Delete Reply

    와.. 정말 오랜만에 재미있게 읽은 인상적인 글입니다. ^^

    • 필로스 2010.04.06 19:29 Modify/Delete

      흠냐 맥전문가인 짠이아빠님이 재미있으셨다니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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