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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단상

일상 잡담 2007.12.20 17:17
투표마감시간 30분전까지 나는 책상에 앉아서 인터넷 서핑을 하고 있었다. 누구를 찍을지 결정을 못했기 때문에 투표장으로 갈 수가 없었다. 결국 투표마감시간 5분전에 투표할 사람을 결정하지도 못한 채 츄리닝 차림으로 집 앞에 있는 투표장으로 나갔다.

습관적으로 2번을 찍을 뻔 했다. 오랜 세월동안 2번이나 3번을 찍던 게 습관이 되었나보다.  2번 앞에서 한 번 멈칫한 손은 그러나 옮겨갈 곳을 쉽게 찾지 못했다. 결국 에라 모르겠다 식의 한 표행사를 하고 나오는 발걸음은 그리 가볍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TV를 켜자마자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뜨악...50.3%... 에혀 이번에도 못 맞췄네..ㅎㅎ

참으로 이상한 대통령 선거였다.

친구나 친지, 직장동료, 심지어 인터넷 상에서조차 그를 지지한다는 사람은 찾기 힘들었다. 선거를 앞두고 부모님과 싸우지 않은 최초의 대통령 선거였다. (87년도에는 노태우 때문에 밥상머리에서 아버님께 뺨까지 맞았었다) 도대체 누가 찍은거야?

여당후보가 없는 최초의 선거였다. 1번 후보는 참여정부의 장관이었고 집권당의 당의장이었지만 선거기간동안 한 번도 현 정부의 공과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여당후보가 아니라 단지 다수당 후보였을 뿐이다.

"누구는 안된다"는 이야기가 "누구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압도해버린 선거였다. 여의도 광장에 백만인파가 모이던 과거에는 만나기만 하면 정치얘기였다. 술자리에서 친구들과 멱살잡이를 하는 것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그 때는 누구나 자신만의 지지자가 있었다.
이번에는 지지자는 없고 안티만 있었던 선거였다. 노무현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명박에게 몰렸지만, 이명박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몰려갈 데가 없었다. 노무현을 좋아하는(했던) 사람들은 누가 그를 계승할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일부 블로거들이 소리높여 외친 문국현 지지의 목소리는 네트워크 밖으로 전달되지 못했다.

개표방송은 더 이상 볼 게 없었다. 하지만 인터넷 상에 올라오는 다양한 글들을 보면서 잠자리에 쉽게 들 수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

반성의 시간.

이제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시간을 줄여야 할 것 같다. '네티즌(블로거)'은 늘 소수였고 비주류였는데 왜 그들이 주류인 것처럼 착각했던 것일까. 정보통신대국, 인터넷 민주주의, 웹2.0, 집단지성 등의 환상적인 단어에 너무 중독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다시 사람을 만나고 다시 소주잔을 기울여야겠다. 내 아들과, 내 후배들과, 내 이웃들을 만나야겠다. 넷상이 아니라 오프라인에서. 닉네임이 아닌 실명으로 대화해야겠다. 너무 오랫동안 우리는 자아도취에만 빠져 있었다.

386세대의 지나친 자긍심에 대해서는 진지한 고민과 뼈를 깎는 반성이 필요하다. 386세대의 기저에 깔린 사고방식(우리는 유신독재 치하에서 자랐으나 우리 손으로 민주화를 이룩했고, 우리 손으로 한국을 IT강국으로 만들었으며 우리 손으로 정권을 획득했다. 그런데 니네들은 뭐니? 생각도 없고, 실력도 없고...)은 이 사회를 더욱 병들게 하고 있다. 88만원 세대와 386세대간의 대화가 무엇보다 절실하게 필요한 때다. 오늘 당장 우리 회사의 젊은 직원들과 '공장일'이 아닌 대화를 해보자.

자, 이제 공수교대가 되었단다. 10년동안 쳐박아두었던 방망이를 다시 꺼내야 할 때다. 너무 오랫동안 휘둘러보지 않았던 방망이라서 방망이가 썩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타순도 잘 기억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번 공격에서 점수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훌륭한 감독과 훌륭한 전술, 뛰어난 선수들이 필요하다. 10년동안 방망이를 놓았던 노장들은 은퇴를 해야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신인선수들에게도 기회를 주자. 공격방법을 잊어버린 감독은 새 감독으로 바꾸자. 필요하다면 다 바꾸자.

무엇보다 나부터 정신 좀 차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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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backs 0 : Comments 12
  1. Favicon of http://inthenet.tistory.com SuJae 2007.12.20 18:58 Modify/Delete Reply

    전 투표서 세곳을 옮긴 후에야 간신히 투표를 했습니다>_<

  2. Favicon of https://www.i-rince.com rince 2007.12.21 00:48 신고 Modify/Delete Reply

    공수교대.........
    이번 수비는 짧길 바래야겠습니다.....
    어제는 너무 우울하여서 웃자구요도 올리지 못했다지요...

    • Favicon of http://philomedia.tistory.com 필로스 2007.12.21 14:21 Modify/Delete

      저런, 웃자구요가 중단되는 참사가 벌어졌었군요...

  3. Favicon of http://www.zoominsky.com/ 짠이아빠 2007.12.21 10:48 Modify/Delete Reply

    감동입니다.. 제가 쓰고 싶어던 여러가지 복잡다단했던 심정을 잘 정리하셨네요... ^^ 전.. 결국 투표를 포기했습니다... 정말 이렇게 난감한 선거는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원래 스포츠는 공격이 더 재미있는거 아시죠.. ^^
    지난 5년 동안 말도 안되는 공격에 시달렸는데.. 이제 좀 품위있고 냉철하면서도 명쾌한 그런 멋진 공격을 준비해야할 듯 합니다.. ^^

    사실 대한민국 기득권층이라는게 오류 투성이 아닙니까.. ^^
    자.. 기운내시고 술은 조금만... 이야기는 많이 합시다.. ^^

    우리 신년회는 언제하죠..ㅋㅋ

    • Favicon of http://philomedia.tistory.com 필로스 2007.12.21 14:22 Modify/Delete

      신년회를 기다리는 건 너무 멀고 크리스마스 파티라도 할까요 ㅎㅎ

  4. Favicon of http://www.raytopia.net 레이 2007.12.21 11:04 Modify/Delete Reply

    딱 보스다운 글이십니다~ 멋져요~ ^^

  5. Favicon of https://j4blog.tistory.com 재준씨 2007.12.21 14:09 신고 Modify/Delete Reply

    네티즌이 소수라는 말에는 정말 제대로 공감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류이고 핵심세력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노무현 대통령을 당선시켰던 그 달콤했던 추억을 현재진행형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저 또한 386세대라고 볼 수 있지만 과거의 영화에 사로잡혀 다른 세대와의 대화를 먼저 단절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나 반성해봅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 Favicon of http://philomedia.tistory.com 필로스 2007.12.21 14:24 Modify/Delete

      달꽃님도 386이셨군요.
      저도 많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6. Favicon of http://conodont.egloos.com 꼬깔 2007.12.22 20:04 Modify/Delete Reply

    그러고보니 저 역시 결혼 전에는 꾸준히 아버님과 부딪혔던 기억이 나네요. 그러고보니 저 역시 올해는 아버님과 부딪히지 않았습니다. :) 전 서울에 있었고, 아버님은 안양에 계셨기 때문인 것 같네요.

  7. 2007.12.24 06:34 Modify/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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