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9.04.23 띄엄띄엄 읽은 책 (3)

띄엄띄엄 읽은 책

일상 잡담 2009.04.23 15:45
나 어릴 적에, 그러니까 열 살 전후였던 것 같은데, 우리 가족은 대여섯 가구가 모여사는 다세대 한옥집에서 살았다. (지금은 그런 구조를 가진 집이 남아 있을 것 같지 않지만 ㄱ자형 한옥 옆에 한칸 두칸 짜리 집들을 마당에 죽 둘러세워놓은 구조였다)

화장실은 대문옆에 있었는데(당연히 푸세식이었다) 대 여섯 가구가 이 화장실 하나를 공용으로 사용했다.

'화장지'라는 상품명조차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종이로 이루어진 모든 것들은 화장지로 사용됐고, 그 시절에 가장 인기있던 화장지는 일력(하루에 한 장씩 떼는 달력)이었다.


아버님께서 인쇄소에 근무하신 관계로 가끔씩 회사에서 가져오신(어떻게 가져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력은 같은 마당을 쓰고 있는 모든 식구들에게 대인기였다. 하지만 치명적인 단점은 인쇄가 불량하여 검은색(빨간 날은 빨간색)잉크가 손에(그리고 그 곳에) 묻어나서 다시 씻어야 한다는 것과 그렇다고 뒷 면은 코팅처리 비슷한 게 돼 있어서 영 닦기가 불편하다는 점이었다.

일력이 떨어지면 그 다음으로 많이 사용됐던 것이 만화책이었고, 그것도 없을 때는 소설책이 슬그머니 나오기도 했는데, 그 때 읽은 책 중에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이광수의 '무정'이다.

그러니까 열 살 즈음에 내가 이광수의 '무정'을 읽었다는 건데, 그것이 지금까지도 기억나는 이유는 아마도 책 내용때문이었을 게 분명하다. 열 살 짜리 남자애가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 저린 다리를 참아가며 영채와 형식의 러브스토리를 읽고 있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하지만 '무정'은 책이 놓여 있는 환경상 결국 띄엄띄엄 읽을 수 밖에 없는 책이었다. 한 번 화장실에서 몇 페이지를 읽고, 읽은 페이지를 사용하고 난 뒤 다음 번 화장실에 갔을 때는 수십 페이지가 사라져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다시 화장실에 돌아올 때까지 이 화장실을 이용할 수십명의 사용분량을 미리 읽을 수 밖에 없었고 그러다보니 다리가 저려서 더 이상 쪼그려있을 수 없을 때까지 버티다가 나오곤 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이광수의 책을 읽을 기회가 없었다. 내가 읽은 부분은 아마 절반도 되지 않았을 거고 마지막부분을 읽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어린 마음에 '영채'라는 이름만 '청순가련형 여인'의 상징적 이미지로 자리잡았던 것 같다.

누가 나를 보고 책을 띄엄띄엄 읽는다는 말을 하길래 문득 든 생각이다.

'일상 잡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자연 수사결과 발표를 보며  (5) 2009.04.24
띄엄띄엄 읽은 책  (3) 2009.04.23
근본주의 단상  (11) 2009.04.15
정말 만나보고 싶은 블로거  (8) 2009.04.13
Trackbacks 0 : Comments 3
  1. Favicon of http://www.yamyong.com 얌용 2009.04.23 17:41 Modify/Delete Reply

    감동적입니다~~ㅡ.ㅜ;;

Writ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