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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속의 기형도와 황지우

일상 잡담 2007.05.21 22:49
블로그질을 시작하면서 알게된 민노씨네 블로그를 구경하다가 기형도 시인에 대한 글을 보고 오랜 전에 썼던 글을 제 블로그에 다시 옮겨 봅니다.

2003년 11월에 동문회 게시판에 썼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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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인기있는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워크래프트3 레인 오브 카오스를 하면서 참 반가운 이름을 만났습니다.

기형도와 황지우.

80년대 학창시절의 우울한 감성을 충격적으로 자극시켜 주었던 두 시인을
20년 가까이 흐른 지금 컴퓨터 게임을 하다가 다시 만나게 될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기형도 시인의 유작이자 대표작인 '입 속의 검은 잎'과
황지우 시인의 문제작 '게 눈 속의 연꽃'이
나이트엘프의 영웅 데몬헌터의 이름으로 다시 찾아온 것입니다.

이 두 시인의 이름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아련한 학창시절에 대한 향수와 함께
20대 젊은이들이 주축일 게임 개발회사에도 기형도와 황지우를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반가움을 동시에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 두 이름을 놓고 '영웅 이름을 이렇게 번역하다니...개빛(유통회사가 한빛소프트입니다) 같으니라고'라는 식의 코멘트들이 넘쳐나는 워3게시판을 보면서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는 없었지만)

잠이 오지 않는 밤.
'입 속의 검은 잎'과 '게눈속의 연꽃'을 다시 한 번 꺼내 봤습니다.

[입 속의 검은 잎]
 by 기형도

택시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끔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 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 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 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 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  
택시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게 눈 속의 연꽃]
by 황지우

1
처음 본 모르는 풀꽃이여, 이름을 받고 싶겠구나
내 마음 어디에 자리하고 싶은가
이름 부르며 마음과 교미하는 기간,
나는 또 하품을 한다

모르는 풀꽃이여, 내 마음은 너무 빨리
식은 돌이 된다, 그대 이름에 내가 걸려 자빠지고
흔들리는 풀꽃은 냉동된 돌 속에서도 흔들린다
나는 정신병에 걸릴 수도 있는 짐승이다

흔들리는 풀꽃이여, 유명해졌구나
그대가 사람을 만났구나
돌 속에 추억에 의해 부는 바람,
흔들리는 풀꽃이 마음을 흔든다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 그대가 있다
불을 기억하고 있는 까마득한 석기 시대,
돌을 깨뜨려 불을 꺼내듯
내 마음 깨뜨려 이름을 빼내가라

2
게 눈속에 연꽃은 없었다
普光의 거품인 양
눈꼽낀 눈으로
게가 뻐끔뻐끔 담배 연기를 피워올렸다
눈 속에 들어갈 수 없는 연꽃을
게는,그러나,볼 수 있었다

3
투구를 쓴 게가
바다로 가네

포크레인 같은 발로
걸어온 뻘밭

들고 나고 들고 나고
죽고 낳고 죽고 낳고

바다 한 가운데에는
바다가 없네

사다리는 타는 게,
게座에 앉네

/end
Trackbacks 1 : Comments 4
  1. Favicon of http://minoci.net 민노씨 2007.05.22 08:15 Modify/Delete Reply

    황지우와 기형도, 이성복, 박노해, 정현종, 신경림, 고은, 장정일, 오규원, 황동규, ... 80년대, 그리고 90년대초까지.. 이런 이름들은 정말 말 그대로 찬란한 영웅의 이름들이었는데 말이죠..

    오랜만에 황지우의 시를 읽어보네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황지우의 시집은 [나는 너다]입니다.
    정말 옛날 생각 많이 납니다.

    제 부족한 글도 트랙백 보냅니다.

    : )

    • PhiloMedia 2007.05.22 10:07 Modify/Delete

      '나는 너다'...이대 앞 서점에서 단숨에 다 읽었던 기억이 나는군요..ㅎㅎ

  2. Favicon of https://raytopia.tistory.com '레이' 2007.05.22 08:26 신고 Modify/Delete Reply

    기다림이란 얼마나 파괴적일까 몇 개의 구름들이 지상으로 내려오기 위하여 얼마나 작은 몸들로 찢기워져서 후드득 떨어지는지. 비가 개이면 숲으로 올라가 보면 좋겠다. 사랄은 서로의 그림자를 나눠 갖는 것일까. - 기형도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 중에서 '편지 10'

    입속의 검은 잎도 좋지만 주절 주절 풀어 쓴 글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짧은 여행의 기록'이 더 좋았더랍니다. 오랫만에~ ^^

  3. Favicon of http://www.soondesign.co.kr 순디자인 2007.05.22 13:26 Modify/Delete Reply

    고등학교 동창 중에 정석이나 성문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기형도 시집을 항상 끼고 다니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때 그친구가 하는 이야기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친구랍시고 떠들고 다녔었죠.

    지금은 연락이 안되지만 꼭 한번 만나고 싶은 친구가 생각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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